랍비 예수 제자도를 말하다 / 로이스 티어베르그 / 국제 제자훈련원
- 브랜드: 국제제자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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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과 거니시던 현장으로 들어가,
복음의 깊이를 더해주는 랍비의 가르침을 맛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의미였을까?
일상과 예배를 새로이 깨우는 1세기 문화/배경 특강!
“제자훈련의 새로운 차원을 모색하는 이들을 위한 필독서!”
-이동원(지구촌교회 원로목사)
“우리는 이 책으로 예수님과 함께 고대의 거리를 걷고,
제자들과 나란히 예수님의 발치에 앉는다.”
-차준희(한국구약학연구소 소장,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율법의 깊이와 복음의 높이를 노래하는 책이다.”
-최명덕(건국대학교 문과대학 명예교수)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증강현실로 보여주는
1세기 랍비의 제자훈련 원리들
복음서에서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은 쉽게 이해되는 분이 아니다. 때로는 성경을 읽다가도 고개를 갸웃하거나,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 문제를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친다. 이것은 상당 부분, 예수님의 유대성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그 진미를 맛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령, 예수님과 제자들은 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오셨을까? 당시에는 여러 뛰어난 성경 선생들이 무보수로 방방곡곡 다니며 성경을 가르쳤고, 사람들은 집을 개방하여 유랑하는 선생과 제자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끝부분에 마리아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으며 그분의 죽으심을 준비했다(눅 10:39, 요 12:3). 이는 당시 문화적 배경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다는 고백이었다. 주님께 부어드린 향유는 생애 마지막 며칠 동안 왕의 향취를 내게 했다. 이것은 또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4~16)와 연결된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1세기 유대인 제자들의 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훈련하시던 자리로 들어가, 함께 그 생생한 말씀을 듣는다. 말씀을 읽을 때 배경이 함께 보이면서 같은 본문을 더욱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스마트폰 화면에 겹쳐진 증강현실처럼, 밋밋한 지면에 말씀이 입체영상처럼 솟아올라 우리의 풍성한 이해를 돕는다.
“이 말씀이 이런 뜻이었다니!”
‘논쟁’은 유대인의 공부에서 주요 특징이었다. 한 랍비는 자기를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제 더 이상 “내 사고의 날을 벼리도록 강제할 맞상대가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제자는 성경뿐 아니라 랍비의 삶을 통해 본문을 공부하길 원했다. 당시의 문화와 사유를 접하면서 신선하게 발견하는 것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몇 가지 예를 보자.
*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490번까지, 즉 매 순간 용서하라는 뜻이 전부일까? 저자는 예수님이 창세기 4장 24절, 라멕의 옛 노래를 인용하시면서(“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랍비식 대조법을 사용하고 계심을 강조한다. 라멕이 보복을 추구했던 그 열심처럼 우리는 피해를 능가하는 파격적인 용서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천부께서 하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매우 기뻐하노라”(막 1:11)는 말씀은 사실 시편 2편 7절, 창세기 22장 2절, 이사야 42장 1절이 연결되어 인용된 것이었다. 이런 성경 인용을 랍비들은 ‘진주 꿰기’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본문을 연결하는 일에 아주 능숙했다.
* 겟세마네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스승을 위해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다니! 하지만 저자가 직접 유월절 당시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또 당시 유대인의 문화를 공부하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통 유월절 잔치는 엄청난 양의 식사에 네 잔의 포도주가 더해졌고 해 질 녘에 시작하여 자정 무렵에야 끝났다. 더욱이 잔치는 며칠 간의 고단한 여행과 준비 후에 진행되었다.
* 오순절에 3천 명이 어느 집 앞에 운집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도 예루살렘 도심은 건물이 빼곡하고, 도로는 비좁고 구불구불하다. 예수님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말한 ‘집’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다락방’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성전’이었다면?
복음의 깊이를 더하는 예수님의 유대성 탐구
랍비들은 기도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지만, 성경을 공부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타인의 손 대접에 의존했지만, 금전적 보상은 일절 받지 않았다. 수년간 문하에서 지도받으며 공부할 제자들을 받아들였고 어딜 가든 제자들과 동행했다. 수업은 포도원, 시장, 길가, 들판 어디든 가릴 것 없이 진행되었다.
이 책은 랍비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훈련하실 때 실제로 주요 배경이 되었던 랍비 문화와 사유체계를 복음적으로 설명하면서, 그 안에 담긴 복음의 진수를 함께 맛보도록 돕고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랍비와 제자들의 담론과 일상을 검토하다 보면 가려진 말씀에 새로운 빛이 비칠 것이다. 익숙한 이야기를 원래 청중의 관점에서 다시 읽을 때 성경은 새로운 깊이와 색감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복음의 깊이를 더해주는 랍비의 가르침을 맛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의미였을까?
일상과 예배를 새로이 깨우는 1세기 문화/배경 특강!
“제자훈련의 새로운 차원을 모색하는 이들을 위한 필독서!”
-이동원(지구촌교회 원로목사)
“우리는 이 책으로 예수님과 함께 고대의 거리를 걷고,
제자들과 나란히 예수님의 발치에 앉는다.”
-차준희(한국구약학연구소 소장,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율법의 깊이와 복음의 높이를 노래하는 책이다.”
-최명덕(건국대학교 문과대학 명예교수)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증강현실로 보여주는
1세기 랍비의 제자훈련 원리들
복음서에서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은 쉽게 이해되는 분이 아니다. 때로는 성경을 읽다가도 고개를 갸웃하거나,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 문제를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친다. 이것은 상당 부분, 예수님의 유대성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그 진미를 맛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령, 예수님과 제자들은 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오셨을까? 당시에는 여러 뛰어난 성경 선생들이 무보수로 방방곡곡 다니며 성경을 가르쳤고, 사람들은 집을 개방하여 유랑하는 선생과 제자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끝부분에 마리아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으며 그분의 죽으심을 준비했다(눅 10:39, 요 12:3). 이는 당시 문화적 배경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다는 고백이었다. 주님께 부어드린 향유는 생애 마지막 며칠 동안 왕의 향취를 내게 했다. 이것은 또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4~16)와 연결된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1세기 유대인 제자들의 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훈련하시던 자리로 들어가, 함께 그 생생한 말씀을 듣는다. 말씀을 읽을 때 배경이 함께 보이면서 같은 본문을 더욱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스마트폰 화면에 겹쳐진 증강현실처럼, 밋밋한 지면에 말씀이 입체영상처럼 솟아올라 우리의 풍성한 이해를 돕는다.
“이 말씀이 이런 뜻이었다니!”
‘논쟁’은 유대인의 공부에서 주요 특징이었다. 한 랍비는 자기를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제 더 이상 “내 사고의 날을 벼리도록 강제할 맞상대가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제자는 성경뿐 아니라 랍비의 삶을 통해 본문을 공부하길 원했다. 당시의 문화와 사유를 접하면서 신선하게 발견하는 것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몇 가지 예를 보자.
*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490번까지, 즉 매 순간 용서하라는 뜻이 전부일까? 저자는 예수님이 창세기 4장 24절, 라멕의 옛 노래를 인용하시면서(“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랍비식 대조법을 사용하고 계심을 강조한다. 라멕이 보복을 추구했던 그 열심처럼 우리는 피해를 능가하는 파격적인 용서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천부께서 하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매우 기뻐하노라”(막 1:11)는 말씀은 사실 시편 2편 7절, 창세기 22장 2절, 이사야 42장 1절이 연결되어 인용된 것이었다. 이런 성경 인용을 랍비들은 ‘진주 꿰기’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본문을 연결하는 일에 아주 능숙했다.
* 겟세마네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스승을 위해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다니! 하지만 저자가 직접 유월절 당시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또 당시 유대인의 문화를 공부하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통 유월절 잔치는 엄청난 양의 식사에 네 잔의 포도주가 더해졌고 해 질 녘에 시작하여 자정 무렵에야 끝났다. 더욱이 잔치는 며칠 간의 고단한 여행과 준비 후에 진행되었다.
* 오순절에 3천 명이 어느 집 앞에 운집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도 예루살렘 도심은 건물이 빼곡하고, 도로는 비좁고 구불구불하다. 예수님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말한 ‘집’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다락방’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성전’이었다면?
복음의 깊이를 더하는 예수님의 유대성 탐구
랍비들은 기도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지만, 성경을 공부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타인의 손 대접에 의존했지만, 금전적 보상은 일절 받지 않았다. 수년간 문하에서 지도받으며 공부할 제자들을 받아들였고 어딜 가든 제자들과 동행했다. 수업은 포도원, 시장, 길가, 들판 어디든 가릴 것 없이 진행되었다.
이 책은 랍비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훈련하실 때 실제로 주요 배경이 되었던 랍비 문화와 사유체계를 복음적으로 설명하면서, 그 안에 담긴 복음의 진수를 함께 맛보도록 돕고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랍비와 제자들의 담론과 일상을 검토하다 보면 가려진 말씀에 새로운 빛이 비칠 것이다. 익숙한 이야기를 원래 청중의 관점에서 다시 읽을 때 성경은 새로운 깊이와 색감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우리의 귀와 생각을 새롭게 가다듬어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는 가능하다고 본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문화를 공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전엔 무덤덤하게 스쳐 가거나 헷갈리기만 하던 구절들이 돌연 살아 운동하기 시작했다. 빛이 비치고 이야기들이 새 의미를 찾고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랍비들의 담론에 주파수를 맞추다 보면 우리가 그랬듯이 당신의 믿음도 깊어지고 성경을 읽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 1장. 예수의 발치에 함께 앉다_ 15면
랍비들은 기도가 아닌 공부가 가장 높은 형태의 예배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이 놀라운가? 랍비들은 기도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지만 성경을 공부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가르친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공부는 냉랭한 지식 위주의 접근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깊은 경외심으로 추동되는 탐구를 의미한다. 탈무드는 경외심 없이 공부하는 사람에 대해 “흡사 보물상자의 안쪽 상자 열쇠는 가지고 있지만, 바깥 상자 열쇠는 없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 2장. 예수께서 랍비로 오신 이유_ 35~36면
유대인은 대부분 성경 교육을 받았고 유대 소년들은 학교에서 읽기를 배웠다.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직접 손으로 해보고 경험하며 기술을 가진 누군가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배웠다.
이 연장선상에서 13세에 학교를 마친 소년은 아버지와 형의 가업에 뛰어들어 생업을 배웠다. 때로는 아버지가 아들을 다른 기능인에게 도제로 보내고 소년은 여러 해 스승의 집에서 더부살이한다. 소년은 멘토 곁에서 종일 허드렛일을 하며 차츰차츰 장인의 능숙한 손놀림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비법을 습득한다. 이처럼 배움은 데이터 습득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삶에 필요한 본질적 지혜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랍비들이 그들의 탈미딤, 즉 제자를 훈련하는 옛 방식이기도 했다.
- 4장. 제자의 총체적 목표_ 71~72면
서구의 개인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처한 현실을 망각하기 쉽다. 생각해보라.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은 충성스런 탈미딤과 동고동락하며 이 마을 저 마을 함께 도보로 이동하면서 가는 곳마다 노숙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순회 랍비의 관행대로 예수님은 너그러운 초청자의 집에서 숱한 저녁을 낯선 이들과 식사하며 보내셨을 것이다. 예수님이 일부러 소란한 무리에게서 떨어져 나오셨을 때조차 종종 제자들이 동행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를 혼자 파송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늘 짝지어 보내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베림이 꼭 필요함을 아셨다.
- 5장. 하베림이 되어 함께 성장하다_ 99면
갑자기 제자들이 왜 그리 깨어 있기 힘들어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제자들은 나보다 핑곗거리가 많았다. 전통 유월절 잔치는 엄청난 양의 식사에 네 잔의 포도주가 더해졌고 해 질 녘에 시작하여 자정 무렵에야 끝났다. 더욱이 잔치는 며칠 간의 고단한 여행과 준비 후에 진행되었다. 틀림없이 예루살렘의 모든 이가 심야 만찬 후 한시라도 빨리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을 게다. 이 부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랍비들은 가볍게 조는 사람은 유월절 저녁 식사에 계속 참여할 수 있지만 깊이 잠든 사람은 참여할 수 없다는 규정을 제정했다.
- 8장. 유월절의 재발견_ 142~143면
고도古都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 이 도시가 얼마나 촘촘하게 밀집해 있는 도시인지 알 것이다. 건물은 빼곡하고 도로는 비좁고 구불구불하다. 예루살렘 성벽 안에서 어느 집 앞에 3천 명이 운집했다는 것은 가히 상상하기가 어렵다. 예수님 시대에 그랬다는 건 더욱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말한 ‘집’이 우리가 상상한 것처럼 다락방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성전이었다면? (...)
그날의 사건이 얼마나 놀라웠던지 3천 명이 새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았다. 어떤 집도 이런 무리를 수용할 만한 큼직한 세례용 욕조를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성전 바로 바깥엔 수백여 개의 의례용 연못이 있었다. 성전에 입장하는 예배자들은 이 못에서 정결례를 행했고 새로 유대교로 개종한 자는 이곳에서 세례 의식을 거행했다. 사실 이 유대교 입교식은 기독교 세례식의 전신이 되었다. 바로 여기서 3천 명의 유대인 예수 신자들이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 9장. 유대 절기 속에서 만난 예수_ 160면
이 지역에서 손 대접은 성스러운 의무로 여겨졌다. 성경에 나온 초기의 손 대접 사례는 아브라함이 생전 처음 보는 세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즉각 살찐 송아지를 잡고 푸짐한 식사를 차린 것이다(창 18:6~7). 예수님도 손 대접에 문외한이 아니셨다. 복음서는 종종 예수님을 만찬과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으로 묘사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건 맞지만 그 여정에서 여러 번 양질의 식사 기회를 누렸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저녁 초대를 거절하거나 잔치에 걸맞지 않은 옷차림을 하거나 식탁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은 손님 등 잔칫상과 관련된 비유를 많이 들려주셨다. 교훈을 주시기 위해 식사 자체를 소재로 사용하셔서 식탁에서 비유를 들려주셨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역시 죽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한 식사자리에서였다.
- 10장. 랍비와 한 상에 앉다_ 178면
현대의 독자가 예수님 말씀이 헷갈린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왕국에 관해 이야기하신 방식이 너무도 철저히 ‘유대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만 왕국에 관해 이야기하신 게 아니었다. 더 큰 왕국 담론이 예수님 주변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그 시대의 담론에 접근하지 못하는 우리는 마치 전화 통화를 엿들으며 한쪽 이야기만 가지고 전체 대화를 추측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같다. 2천 년 된 유대 담론에 주파수를 맞춘다면 우리의 이해는 더욱 명료해질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에 관한 생각이 확연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 13장.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제자_ 255면
지금쯤이면 당신도 예수님의 ‘유대적 맥락’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새로운 질문이 머릿속에서 계속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이게 관용구는 아닐까? 유대 문화 속에서는 어떤 의미로 통했을지 궁금한데. ...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약을 인용하신 걸까?” 등등. 이제 예수님이 살아가셨던 유대 배경을 더 많이 알게 되었으니 돌아갈 길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당신이 더 깊게 성장하도록 거룩한 호기심에 불을 댕겼기를 바란다.
당신이 우리와 같다면 기독교의 유대적 뿌리를 배우는 과정에서 신앙이 더 튼튼해졌을 것이다. 예수님의 역사적 실재가 명료하게 초점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 말씀과 주장 역시 더 분명해졌을 것이다. 과거 50년간 고고학자와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중요한 문서와 고대 단서들을 대거 발굴했다. 기실 우리는 이제 1세기 세상에 대해 이전 세기의 신학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상당 부분은 고대 문서의 신뢰성을 확증했고 많은 성경학자는 이전보다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에 덜 회의적인 자세를 취했다.
- 14장. 예수의 참 제자로 살아가는 길_ 278면
- 1장. 예수의 발치에 함께 앉다_ 15면
랍비들은 기도가 아닌 공부가 가장 높은 형태의 예배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이 놀라운가? 랍비들은 기도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지만 성경을 공부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가르친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공부는 냉랭한 지식 위주의 접근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깊은 경외심으로 추동되는 탐구를 의미한다. 탈무드는 경외심 없이 공부하는 사람에 대해 “흡사 보물상자의 안쪽 상자 열쇠는 가지고 있지만, 바깥 상자 열쇠는 없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 2장. 예수께서 랍비로 오신 이유_ 35~36면
유대인은 대부분 성경 교육을 받았고 유대 소년들은 학교에서 읽기를 배웠다.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직접 손으로 해보고 경험하며 기술을 가진 누군가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배웠다.
이 연장선상에서 13세에 학교를 마친 소년은 아버지와 형의 가업에 뛰어들어 생업을 배웠다. 때로는 아버지가 아들을 다른 기능인에게 도제로 보내고 소년은 여러 해 스승의 집에서 더부살이한다. 소년은 멘토 곁에서 종일 허드렛일을 하며 차츰차츰 장인의 능숙한 손놀림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비법을 습득한다. 이처럼 배움은 데이터 습득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삶에 필요한 본질적 지혜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랍비들이 그들의 탈미딤, 즉 제자를 훈련하는 옛 방식이기도 했다.
- 4장. 제자의 총체적 목표_ 71~72면
서구의 개인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처한 현실을 망각하기 쉽다. 생각해보라.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은 충성스런 탈미딤과 동고동락하며 이 마을 저 마을 함께 도보로 이동하면서 가는 곳마다 노숙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순회 랍비의 관행대로 예수님은 너그러운 초청자의 집에서 숱한 저녁을 낯선 이들과 식사하며 보내셨을 것이다. 예수님이 일부러 소란한 무리에게서 떨어져 나오셨을 때조차 종종 제자들이 동행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를 혼자 파송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늘 짝지어 보내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베림이 꼭 필요함을 아셨다.
- 5장. 하베림이 되어 함께 성장하다_ 99면
갑자기 제자들이 왜 그리 깨어 있기 힘들어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제자들은 나보다 핑곗거리가 많았다. 전통 유월절 잔치는 엄청난 양의 식사에 네 잔의 포도주가 더해졌고 해 질 녘에 시작하여 자정 무렵에야 끝났다. 더욱이 잔치는 며칠 간의 고단한 여행과 준비 후에 진행되었다. 틀림없이 예루살렘의 모든 이가 심야 만찬 후 한시라도 빨리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을 게다. 이 부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랍비들은 가볍게 조는 사람은 유월절 저녁 식사에 계속 참여할 수 있지만 깊이 잠든 사람은 참여할 수 없다는 규정을 제정했다.
- 8장. 유월절의 재발견_ 142~143면
고도古都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 이 도시가 얼마나 촘촘하게 밀집해 있는 도시인지 알 것이다. 건물은 빼곡하고 도로는 비좁고 구불구불하다. 예루살렘 성벽 안에서 어느 집 앞에 3천 명이 운집했다는 것은 가히 상상하기가 어렵다. 예수님 시대에 그랬다는 건 더욱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말한 ‘집’이 우리가 상상한 것처럼 다락방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성전이었다면? (...)
그날의 사건이 얼마나 놀라웠던지 3천 명이 새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았다. 어떤 집도 이런 무리를 수용할 만한 큼직한 세례용 욕조를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성전 바로 바깥엔 수백여 개의 의례용 연못이 있었다. 성전에 입장하는 예배자들은 이 못에서 정결례를 행했고 새로 유대교로 개종한 자는 이곳에서 세례 의식을 거행했다. 사실 이 유대교 입교식은 기독교 세례식의 전신이 되었다. 바로 여기서 3천 명의 유대인 예수 신자들이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 9장. 유대 절기 속에서 만난 예수_ 160면
이 지역에서 손 대접은 성스러운 의무로 여겨졌다. 성경에 나온 초기의 손 대접 사례는 아브라함이 생전 처음 보는 세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즉각 살찐 송아지를 잡고 푸짐한 식사를 차린 것이다(창 18:6~7). 예수님도 손 대접에 문외한이 아니셨다. 복음서는 종종 예수님을 만찬과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으로 묘사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건 맞지만 그 여정에서 여러 번 양질의 식사 기회를 누렸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저녁 초대를 거절하거나 잔치에 걸맞지 않은 옷차림을 하거나 식탁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은 손님 등 잔칫상과 관련된 비유를 많이 들려주셨다. 교훈을 주시기 위해 식사 자체를 소재로 사용하셔서 식탁에서 비유를 들려주셨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역시 죽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한 식사자리에서였다.
- 10장. 랍비와 한 상에 앉다_ 178면
현대의 독자가 예수님 말씀이 헷갈린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왕국에 관해 이야기하신 방식이 너무도 철저히 ‘유대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만 왕국에 관해 이야기하신 게 아니었다. 더 큰 왕국 담론이 예수님 주변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그 시대의 담론에 접근하지 못하는 우리는 마치 전화 통화를 엿들으며 한쪽 이야기만 가지고 전체 대화를 추측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같다. 2천 년 된 유대 담론에 주파수를 맞춘다면 우리의 이해는 더욱 명료해질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에 관한 생각이 확연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 13장.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제자_ 255면
지금쯤이면 당신도 예수님의 ‘유대적 맥락’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새로운 질문이 머릿속에서 계속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이게 관용구는 아닐까? 유대 문화 속에서는 어떤 의미로 통했을지 궁금한데. ...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약을 인용하신 걸까?” 등등. 이제 예수님이 살아가셨던 유대 배경을 더 많이 알게 되었으니 돌아갈 길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당신이 더 깊게 성장하도록 거룩한 호기심에 불을 댕겼기를 바란다.
당신이 우리와 같다면 기독교의 유대적 뿌리를 배우는 과정에서 신앙이 더 튼튼해졌을 것이다. 예수님의 역사적 실재가 명료하게 초점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 말씀과 주장 역시 더 분명해졌을 것이다. 과거 50년간 고고학자와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중요한 문서와 고대 단서들을 대거 발굴했다. 기실 우리는 이제 1세기 세상에 대해 이전 세기의 신학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상당 부분은 고대 문서의 신뢰성을 확증했고 많은 성경학자는 이전보다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에 덜 회의적인 자세를 취했다.
- 14장. 예수의 참 제자로 살아가는 길_ 278면